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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4주년 기획] 마포나루로 돌아오지 못한 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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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호
기사입력 2019-08-14

 

▲     © jmb방송

 

[jmb방송=하동호 기자] "조선 사람은 제령(制令)을 위반하지 아니하면 자살하지 아니할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는 말로 비롯하여 사람은 고정체(固定體)가 아니라 유동체(流動體)이라. 

 

따라서 점점 향상하고 진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라. 이것은 헤겔이나 다윈이 이미 말하였음으로 나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조선 사람도 역시 사람이라 살기를 위하여 향상하고 진화하기를 요구할 것은 그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람이 향상하고 진화하는 데는 혁명이라는 것이 있나니 혁명이라 하면 매우 위험한 듯이 생각하나 사실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닭의 알이 변하여 병아리가 되는 것도 혁명이요, 올챙이가 변하여 개구리가 되는 것도 혁명이라. 혁명은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적 법칙이니 조선 사람이 살기를 부르짖고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요 또는 억지할 수 없는 일인즉 일본 사람은 이러한 조선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바란다.

  ……(중략)

총독정치는 나의 기대를 산산이 깨쳐버리고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었노라. 교육으로나 산업으로나 어디를 보든지 총독정치는 조선 사람의 살기를 바라는 정치인가를 의심케 하였음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 직접 또는 내심으로 관계한 일은 없으나 어찌 됐든 이번 사건은 총독정치가 자연히 만들어낸 것인 즉, 이것만을 일본사람이 알아준다면 나는 5년 징역은 고사하고 10년 징역이라도 달게 받겠다”

 

 - 1923.5.19. 동아일보에 보도된 김한 선생 최후진술


청년 김한(1887~1931?)은 침착한 태도로 일어나서 대략 한 시간 동안이나 흐르는 물과 같은 유창한 일본말로 자신의 사회관과 총독정치를 비평했다.

 

김한은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23년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1심 최후진술에서 괘씸죄가 적용되어 검사 구형인 5년에 2년을 더한 7년형이 내려졌다. 

 

분단이라는 말이 없던 1945년 8월 15일. 온 겨레가 감격스러운 조국 해방의 날을 맞았다. 하지만 그 곳에 김한은 없었다. 

 

광복 60주년이던 지난 2005년 광복절, 마침내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해방 후 반세기 이상이 흘러서야 조국은 그를 불러줬다.

 

1887년, 선생이 태어난 곳은 현재 서울 마포대교 북단의 옛 마포나루터 인근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25세 되던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부터다. 상해, 천진, 봉천 등지에서 대한독립단원으로 반일운동에 참가했으며 1919년 임시정부 산하 사료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안창호 선생 등의 발의로 설치된 임시사료편찬위원회에서는 한국독립의 역사적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한일관계사료집> 4권을 편찬하기도 했다.

 

1920년 무렵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사법부장, 법무국 비서국장을 맡았고 조선청년연합회를 발기해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21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국내 최초의 청년 독립단체인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는 무산자동맹회에 참여했다. 

 

『김원봉 연구』(염인호, 창비.1993)에서는 이 시기의 김한 선생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김한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선청년연합회 집행위원이었으며 서울청년회와 무산자동맹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는 특히 김사국과 함께 일제하 청년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서울청년회의 최고 지도자였다.”

 

이후, 김한 선생은 1931년 일제의 검거를 피해 국외로 나갔으나, 연해주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50년 뒤인 1981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맞아 전두환 대통령의 퇴진 시위를 주도하다가 구속된 한 청년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김한 선생의 외손자다. 선생의 1남3녀 중 3녀 김예정의 5남5녀 중 막내인   국회의원 우원식 씨다.

 

우 의원은 “할아버지가 최후진술로 2년형이 늘어났는데, 저도 2심 최후진술에서 ‘전두환 정권은 군사독재 정권’이라고 비판한 이유로 형이 늘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며, “9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할아버지의 최후진술은 저에게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고 삶의 항해를 지켜주는 푯대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복 74돌이다. 사실은 역사로 기록되어 후손에게 남겨진다. 후손은 역사를 덮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의 역사는 저물었지만 과거사를 부정, 왜곡하는 세력과 일제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겨레의 미래를 위해 삶을 받친 선열의 역사는 부정과 왜곡, 잔재를 넘어서는 후손의 거울이며 푯대임을 광복절을 맞아 되새겨 본다. 

 

김한 선생은 그의 고향인 마포나루로 돌아오지 못하고 저물었지만, 후손인 우리에게는 그를 부르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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